일제강점기의 인물을 평가할 때 우리는 종종 하나의 단어를 찾는다.
독립운동가인가, 친일파인가. 피해자인가, 가해자인가.
그런데 이 두 칸 가운데 어느 한쪽에만 넣기 어려운 인물이 있다.
홍사익(洪思翊).
그는 조선 출신으로 일본 육군 중장까지 오른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고 자신이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일본 사회의 조선인 차별에도 강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일본군 장교로 침략전쟁에 참여했고, 항일세력과 대치하는 부대를 지휘했으며 일본 제국에 대한 조선인의 협력을 주장했다. 독립운동 진영으로 넘어올 기회가 있었지만 끝까지 일본군에 남았다.
그리고 해방 이듬해인 1946년, 필리핀에서 전범으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홍사익의 삶이 지금까지도 논쟁적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조선인이라는 정체성을 버리지 않았지만, 일본 제국의 군복 역시 끝내 벗지 않았다.
나라를 잃어버린 군인 생도
홍사익은 1880년대 후반 경기도 안성에서 태어났다.
양반가의 후손이었지만 집안 형편은 넉넉하지 않았다. 어려서 한학을 배웠고 이후 군인의 길을 택해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들어갔다.
하지만 그가 군인이 되려던 시기는 대한제국 자체가 무너져가던 때였다.
1907년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고 무관학교까지 폐지되면서 홍사익을 비롯한 생도들은 일본으로 건너가 군사교육을 계속 받게 된다.
이들 가운데는 훗날 운명이 완전히 갈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지청천은 일본군을 탈출해 독립운동에 뛰어들었고 훗날 한국광복군 총사령관이 됐다. 김광서 역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반면 홍사익은 일본군에 남았다.
같은 학교에서 공부하던 조선 청년들이 나라가 사라진 뒤 서로 정반대의 길로 갈라진 것이다.
일본군 엘리트가 된 조선인
홍사익은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914년 일본군 장교로 임관했다.
이후 육군대학까지 졸업했다.
당시 일본 육군대학은 일본군의 최고급 참모와 지휘관을 양성하는 핵심 엘리트 과정이었다. 식민지 조선 출신자가 이 과정을 밟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홍사익은 일본군 조직 안에서 계속 승진했다.
하지만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었다.
그는 일본식으로 이름을 바꾸지 않았다.
창씨개명이 실시된 뒤에도 홍사익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사용했다.
새로운 부대에 지휘관으로 부임할 때 자신이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밝혔다는 증언도 남아 있다.
그에게 조선인이라는 정체성은 감춰야 할 과거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 정체성이 일본 제국에 대한 저항으로 이어진 것도 아니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홍사익의 모순적인 삶이 시작된다.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숨기지 마라”
그의 생각을 보여주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아들 홍국선이 일본 학교에서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자 아버지에게 물었다.
왜 우리는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느냐는 것이었다.
홍사익은 일본과 조선의 관계를 영국과 아일랜드의 관계에 빗대 설명했다고 전해진다.
아일랜드인이 영국에서 차별받는다고 해서 자신이 아일랜드인이라는 사실을 숨기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너 역시 조선 사람이라는 사실을 당당히 밝히라는 취지였다.
그는 일본 사회의 차별을 알고 있었다.
자신 역시 일본군에서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았다는 증언들이 남아 있다.
그러나 그가 선택한 해결책은 독립이나 저항이 아니었다.
체제 안에서 실력을 인정받고 조선인의 지위를 높이는 것이었다.
협력하면 동등해질 수 있다는 믿음
홍사익의 선택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것이 이 생각이다.
그는 조선인이 일본 제국에 충실하게 기여하면 언젠가는 일본인과 동등한 권리를 인정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식민지배를 인정한 논리지만 당시 홍사익에게는 나름의 현실적 생존전략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그 믿음이 개인적인 처세에서 끝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일본군 고급장교가 됐고 만주와 중국에서 일본의 군사정책에 참여했다.
일본의 침략전쟁이 확대되면서 그의 책임 역시 커졌다.
조선인이라는 정체성을 지키는 것과 일본 제국의 군인으로 복무하는 것은 그의 삶에서 동시에 존재했다.
태항산에서 마주한 또 다른 조선인들
1941년 홍사익은 육군 소장으로 진급해 중국 허베이성에 주둔한 일본군 보병 제108여단장이 됐다.
당시 화북지역에서는 중국 팔로군이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팔로군과 함께 싸우던 조선인들이 있었다.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였다.
1941년 말 태항산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조선의용대원 여러 명이 전사하거나 부상을 입고 포로가 됐다.
홍사익의 108여단 역시 이 지역에서 팔로군을 상대로 작전을 수행했다.
다만 현재 확인되는 자료만으로 특정 전투에서 홍사익의 부대가 조선의용대와 직접 교전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분명한 사실 하나는 있다.
같은 시기 같은 중국 화북 전선에서 한쪽에는 일본군 장성이 된 조선인 홍사익이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일본군과 싸우는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이 있었다.
식민지 조선이 만들어낸 가장 아이러니한 풍경 가운데 하나였다.
일본군 장성이 광복군으로 넘어왔다면
홍사익에게는 다른 길을 선택할 기회도 있었다.
일본군을 탈출해 독립운동에 뛰어든 옛 동료들은 그에게도 항일 진영에 합류할 것을 권유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옛 동료였던 지청천과의 관계는 여러 기록에서 등장한다.
홍사익이 일본군 장성 신분으로 광복군에 합류했다면 상징적 파급력은 엄청났을 것이다.
일본 육군대학을 졸업한 현역 장성이 일본군을 버리고 독립군으로 넘어오는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홍사익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가 일본군을 떠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설명이 전해진다.
자신이 탈출하면 일본군에 복무하던 수많은 조선인 병사들이 의심과 보복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 군인으로서 이미 입은 제복을 배신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는 증언도 있다.
하지만 결과는 분명하다.
독립운동에 뛰어든 동료들이 여러 차례 다른 길을 보여줬음에도 그는 끝까지 일본군에 남았다.
필리핀으로 향한 조선인 중장
1944년 홍사익은 필리핀으로 이동해 일본군의 포로수용소 관련 업무를 지휘하게 됐다.
같은 해 육군 중장으로 진급했다.
그러나 당시 일본군은 이미 패색이 짙었다.
보급망은 무너졌고 식량과 의약품은 부족했다. 그 과정에서 필리핀 각지의 연합군 포로수용소에서는 굶주림과 질병, 구타, 강제노동과 살해 등 심각한 포로 학대가 발생했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자 홍사익도 미군에 항복했다.
그리고 일본군 장성이 아니라 전범 피고인으로 법정에 서게 된다.
107개 혐의, 84개 유죄
1946년 마닐라에서 홍사익에 대한 전범재판이 열렸다.
검찰이 제시한 죄상은 107개에 달했다.
포로들의 기아와 의료시설 부족, 열악한 수용환경, 구타와 상해, 강제노동, 살해 등이 포함됐다.
홍사익 자신이 직접 포로를 살해했다는 것이 사건의 핵심은 아니었다.
문제는 지휘책임이었다.
자신의 지휘·감독 아래 있는 조직에서 벌어진 범죄를 고급지휘관이 어디까지 책임져야 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재판부는 107개 가운데 84개를 유죄로 인정했다.
변호인 측에서는 홍사익이 식민지 출신 조선인으로 일본군 내부에서도 차별을 받았다는 점을 정상참작 사유로 제시했다.
검찰의 시각은 달랐다.
그가 일본 국적을 가지고 일본 육군대학을 졸업했으며 일본군 여단장과 중장까지 지낸 고급장교라는 사실이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홍사익 자신도 다른 재판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묻는 질문에 조선인이지만 국적은 일본이라고 밝힌 바 있다.
결국 법정은 그를 식민지 조선의 피해자가 아니라 일본군의 고급 지휘관으로 판단했다.
사형이 선고됐다.
마지막으로 읽어달라고 한 성경
1946년 9월 26일 밤.
57세의 홍사익은 필리핀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의 마지막 순간을 지켜본 일본인 기독교인의 회고가 남아 있다.
처형을 앞두고 가족에게 남길 말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자 홍사익은 특별한 유언 대신 성경을 읽어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당시 증언을 인용한 국사편찬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그 자리에서 읽힌 것은 시편 39편 후반에서 40편 전반이었다.
죄와 용서, 인간의 덧없음과 구원을 이야기하는 구절이었다.
성경 낭독이 끝난 뒤 홍사익은 마지막으로 평화로운 세계를 만드는 데 힘써 달라는 취지의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형장으로 향했다.
그는 피해자였을까, 가해자였을까
홍사익을 둘러싼 논쟁은 그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다.
한쪽에서는 그가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평생 조선인이라는 정체성을 유지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일본군 내부에서 조선인이 받는 차별에도 민감했고 독립운동에 뛰어든 옛 동료들의 가족을 돕기도 했다는 기록도 있다.
반대쪽에서는 더 근본적인 사실을 지적한다.
그는 일본 제국의 침략전쟁을 수행한 현역 장성이었다.
중국에서 일본군 부대를 지휘했고 조선인의 일본 제국 협력을 긍정했으며 독립운동 진영으로 넘어갈 기회가 있었음에도 일본군을 떠나지 않았다.
마지막에는 일본군 중장으로서 전쟁범죄에 대한 지휘책임까지 물었다.
대한민국 정부가 그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조선인이면서 일본군인이었던 사람
홍사익을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는 그의 삶에서 어느 한쪽만 떼어내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홍사익만 보면 민족적 자존심을 지킨 군인처럼 보인다.
일본군 중장 홍사익만 보면 제국에 충성한 식민지 출신 협력자다.
일본에서 차별받던 아들을 위로한 아버지를 보면 식민지 조선인의 아픔이 보인다.
중국과 필리핀에서 일본군을 지휘한 장성을 보면 제국주의 전쟁에 참여한 책임이 보인다.
두 모습은 서로를 지워주지 않는다.
그는 조선인이었다.
그리고 일본 제국 육군의 중장이었다.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지만 일본군이라는 자신의 위치에서도 끝내 벗어나지 않았다.
어쩌면 홍사익의 생애가 남기는 가장 불편한 질문은 이것인지도 모른다.
식민지 체제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는 것과, 그 체제에 협력하지 않는 것은 과연 같은 일인가.
홍사익은 첫 번째는 끝까지 지켰다.
그러나 두 번째 길을 선택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의 삶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것은 영웅이나 매국노라는 한 단어가 아니라, 그가 어떤 순간마다 무엇을 선택했는지를 끝까지 바라보는 일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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